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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예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2018-06-17 19:00 | 조회수 : 30 | 댓글 : 1

조지 버클리 (1685년 ~ 1753년) Geoge Berkeley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앞 세대인 존 로크처럼 조지 버클리도 경험주의자로 경험을 지식의 주된 원천으로 보았다.
유래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관점은 원칙적으로는 합리적 반성만으로도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관점과 대조된다.
버클리는 로크와 같은 가정을 공유했으나 사뭇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버클리에 따르면 로크의 경험주의는 온건했다.
감각과 관계없는 세계의 존재를 여전히 고려했고, 인간이 정신과 육체라는 별개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르네 데카르트를 따랐다.
반면에 버클리는 훨씬 극단적인 경험주의를 취함으로써 결국 '비물질론적 관념론'에 이르렀다.
이는 곧 그가 일원론자로서 우주에 오직 한 종류의 실체만 있다고 믿었으며, 관념론자로서 그 유일한 실체란 물질이 아니라 정신, 즉 생각이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버클리의 견해는 보통 "에쎄 에스트 페로크피(Esse est percipi,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라는 라틴어 문구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거나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aut perciperi aur peripi)"가 될 것이다.
버클리에 따르면 세계는 지각하는 정신과 그 정신의 관념만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버클리가 외부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그 세계가 우리가 지각하는 바와 어떻게든 다르다고 주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오히려 "지식은 모두 경험에서 비롯해야 하며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은 지각되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그 지각되는 대상이란 곧 "관념(정신적 표상)"이므로, 우리는 관념과 관념의 지각자 외에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을 근거가 전혀 없다.

 

인과작용과 의지작용

조지 버클리의 표적은 로크와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 정교하게 발전시킨 데카르트식 세계관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물질계는 무수한 물리적 입자인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미립자의 본질과 상호작용 때문에 세계가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나타난다.
버클리가 보기에 더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관점의 주장에 따르며 세계가 우리의 감각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각적 관념을 낳는다는 데 있다.
버클리는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 이 관점을 반박한다.
첫째 그의 주장에 따르며 인과작용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바(특정 사건이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는 점)는 전적으로 자기 의지작용의 경험(자신의 의지에 따라 활동함으로써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방식)에 기초한다.
버클리의 논지는 단순히 우리가 의지활동의 경험을 세계에 투사하는 행위(우리가 세계 때문에 세계에 투사하는 행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논지는 우리관념의 원인인 관념계 너머에 물질계란 없으므로 사실상 '물질적 원이'이 없다는 것이다.
버클리에 따르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종류의 원인은 바로 의지에 관련된 원인, 즉 의지의 발동이다.
버클리의 두번째 반박에 따르면, 관념이란 정신적 실체이므로 물질적 실체를 닮을수 없다.
두 유형은 속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이나 사진은 물체이므로 다른 물체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행위는 그 관념을 어떤 물체로 오인하는 행위는 그 관념을 어떤 물체로 오인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요컨대 관념은 다른 관념만을 닮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관념을 통해서만 세계를 경험하므로, 우리가 '물질적인 것'이라는 개념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우리가 시레로 이해하는 대상은 정신적인 것이다.
세계는 순수하게 생각으로만 구성되어있고, 스스로 지각하지 않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지각되는 대상중 하나로서만 존재한다.

 

지각의 원인

하지만 "지각자가 아닌 것은 지각될 때만 존재한다"는 말은 곧 내가 방을 떠나면 내 책상, 컴푸터, 책 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닐까.
그것들은 더 이상 지각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버클리는 "내가 방에 없을 때라도 그것은 여전히 신에게 지각되어 있으므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결국 신의 존재, 그것도 특별한 종류의 신(세계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신)의 존재에 의존하는 셈이다.
버클리가 생각하기에 신이 세계에 관여하는 정도는 이보다 더하다.
앞서 우리가 확인했듯,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질적 원인은 없고 '의지의 작용'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지작용만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세계의 경험을 통제하지 못하기에, 무엇을 경험할지 선택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세계는 제 방식대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내 관념을 낳는 의지작용은 내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그래서 버클리가 생각하는 신은 우리는 지각자로 창조하기만 한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지각활동을 끊임없이 유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여러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 중 가장 급한 문제는 이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사물을 부정확하게 인식하기도 하는가?
왜 신은 우리를 속이고 싶어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버클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지각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우리가 실수하는 부분은 자신이 지각한 대상을 판단하는 과정에 있다.
예컨대 물에 반쯤 잠긴 노가 굽어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실제로 굽어있다.
내가 실수하는 부분은 그 노가 굽어있는 것처럼 보일뿐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하지만 내가 물속으로 팔을 뻗어 그 노를 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확실히 곧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 노가 곧은 동시에 굽어 있을 수 없으므로 사실상 노는 내가 보는 노와 만지는 노, 이렇게 두 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버클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이 같은 노를보고 있다면 그들은 사실상 두 개의 다를 노를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지각이 수렴되는 하나의 '실제적' 노가 '그 바깥'에 없기 때문이다.

 

유아론의 문제

따라서 버클리의 이론체계가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우리가 절대 같은 대상을 지각하지 않는다는 점인 듯 하다.
우리는 각자 지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 단절되어있다.
신에게 노와 관념이 있다는 점은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3의 과념, 즉 제3의 노이기 때문이다.
신이 나의 관념과 당신의 관념을 야기하긴 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 및 신과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지 않는 한 여전히 별개의 세 관념이 존재하고 따라서 별개의 세 노가 존재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유아론의 문제(내가 존재를 확신 할 수 있는 대상 혹은 실제로 존재할 법한 대상이나 자신뿐일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유아론 문제의 한가지 가능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손을 들어 올리는 등 세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또 이와 비슷한 변화가 다른 사람들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인지할 수 있으므로, 그런 육체도 내부의 '의식'때문에 변화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버클리 이론의 문제점은 들어 올려지는 '실제적'손이 없는데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자기 손이 올라간다는 관념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관념만 그럴 수 있을 뿐 타인의 관념은 어쩌지 못한다.
다시말해 나는 타인의 손이 올라간다는 관념을 제공하는 신에게 여전히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우리에게 실증적 확실성을 제공하기는커녕 우리가 다른 정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면 신(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을 신)에 대한 믿음에 의존해야 하도록 만들어 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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