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아시아
아가는 예뻐 한국전쟁의 시작 - 북한 인민군의 선제 공격 근거
2023-08-07 00:29 | 댓글 : 0

북한이 남침했다고 알고는 있지만, 남침의 증거는 모르는 사람이 많은것 같아 나열해 보겠습니다.

북한은, 미군과 국군이 북침했으나 인민국이 반격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고 하나, 전쟁 이전의 상황을 보면 이게 얼마나 비논리적인 얘긴인지 알 수 있죠.

 

 

1. 전쟁 이전 한반도엔 미군이 단 한명도 없었다.

남한에 있던 주한 미군은 1949년 6월 30일부로 완전 철수 했다.

주한미군은 1948년 8월 15일 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여순사건으로 잠시 연기 되었으나 1949년 4월 부터 철수를 제개했다.

즉, 전쟁이 나기전에 한반도에 미군은 단 한명도 없었다.

 

 

2. 에치슨 선언 - 이미 미군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방어라인에서 지워 버렸다.

미국은 당시 국무부 장관이였던 에치슨에 의해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 방어 라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한반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즉, 1950년 6월 시점에서 김일성의 판단을 추측해 보자면

"현재도 미군이 없고, 앞으로 미군이 참전 하지 않을것"이라 판단 했을 것이다.

(군사력 투입을 중단한 나라가 침략을 했다는 주장의 모순)

 

 

3. 당시 미군은 이미 무지막지한 군 감축 중이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3000만명에 달하던 엄청난 규모의 미군을 1/20 이하로 감축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병력의 대다수는 미국 입장에선 주전장인 서독을 포함한 유럽에 배치하고 있었다.

즉,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시작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엄청난 군비 감축중인 나라가 침략을 했다는 주장의 모순)

 

 

4. 당시 소련측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 소련이 증인이다.

1994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 김영상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때

러시아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소련측 자료 216점과, 548쪽의 문서를 한국에게 넘겨줬다.

소련의 스탈린과 김일성은 전쟁과 관련해 수차례 만남을 가졌고

1949년 3월 7일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무기와 장비지원, 군사원조를 요청하면서 남침 허가를 간청했다

그 당시 대화 내용을 소련은 그대로 자료로 남겨놨는데

당시 김일성의 발언 

“스탈린 동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 군대는 남한 군대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한의 인민 대중들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하다.”

이후 1949년 3월 17일 "조·소 군사비밀 협정"을 체결했고 이 협정에 의해 

"소련은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 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20명의 특별군사고문단을 1949년 5월 20일까지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8일 중국과도 "조·중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양측은 여하한 성질의 침략에 대해서도 공동 방위를 한다.

어떠한 제국주의 세력이든 북한 또는 중공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양국은 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동전쟁에 있어 공동행동을 취한다.”

 


5. 결국,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다.

최종적으로 1950년 4월 10일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최종적으로 승인한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청을 수락한 이유는

첫째, 인민군대 군사력이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육성됐다.

남한의 군사력 즉 무기, 장비가 미약하고 전투병력은 전투 경험이 없다.

둘째, 국제 정세가 유리하게 변했다.

중공군이 중국을 공산화하고 1949년 10월 1일 공산국가를 수립했다.

이제 중공이 북조선의 남침 전쟁을 도울 수 있게 됐다.

미군이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하고 1950년 1월 12일에는 애치슨라인을 통해 남한을 극동 방위권에서 제외했다.

 

 

6. 북한의 남침 전쟁 작전 계획을 소련이 작성했다.

스탈린은 바실리에프 장군에게 남침 전쟁 작전 계획을 작성토록 지시했다

바실리에프 중장에 의해 작성된 김일성의 남침 전쟁 계획은 3단계 작전으로 만들었다.

“제1단계 작전은 38선을 돌파해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수원 원주 삼척을 잇는 선까지 5일 안에 진격하고,

제2단계 작전은 그로부터 14일 안에 군산 전주 대구 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격한다.

제3단계는 그 후 10여일 안에 목포 여수 사천 마산 부산을 잇는 남해 일대를 점령해 전쟁을 종결한다.”

 

 

7. 중국측 참전 군인의 증언

김일성의 남침을 돕기 위한 중공과 합의한 조·중 상호방위협정에 의해 의용군이 결성되었다.

1999년 KBS에서 취재한 의용군에 참전했던 조선족 참전 군인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1949년 12월에 이미 북한 지역에 진입해 있었다고 한다.

 

 

8.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는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자마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채택한 결의이다.

한국 전쟁과 관련한 최초의 유엔 결의이자, 국제 연합 창립 이래 전쟁 억제와 평화 유지를 위한 최초의 시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북위 38도선 이북으로 철군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국제 연합인 유엔에서 이미 조선의 침략 행위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9. 한국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다.

전투 부대 파견국 16개국 (미국,영국,호주,네델란드,캐나다,뉴질랜드,태국,그리스,남아공,벨기에,필리핀,터키,룩셈부르크,.콜롬비아,에티오피아,프랑스)

의료지원 및 시설파견국 5개국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 

직접 파견국(21개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국을 합치면 총 63개국에 달한다.

북한은 마치 미국 혼자서 침략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 세계에서 이토록 많은 국가가 남한을 지원하고 있었다.

미국의 침략 전쟁이라면 이런 국제적인 지원이 가능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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